존재는 선택이 아니었지만, 다음 생은 약간 수치스럽게 선택할 수 있다.
1. 입장 – 죽고 나서 처음 마주한 건 택배 상자보다 차가운 공간
나는 눈을 떴다.
하얀 공간도 아니고, 따뜻한 빛도 아니었다.
그냥… 반도시, 반오피스 느낌.
LED등 아래에 마른 침묵만 맴도는, 면접 대기실 같았다.
벽에는 숫자가 하나씩 바뀌고 있었고,
내 번호는 D-20717.
내 앞 사람은 울고 있었고, 그 앞 사람은 아무 표정도 없었다.
“D-20717, 면접실로 들어가주세요.”
문을 열자마자,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책상에 앉아 있는 건 사람 같은 게 아니라, 눈 대신 숫자가 흐르는 회색 얼굴의 AI 면접관이었다.
슈트는 깔끔했고, 말투는 더 깔끔했다.
“이름?”
“정유진이요.”
“사망 사유?”
“…베개에 얼굴 파묻고 누워 있다가, 질식…? 한거같아요..”
면접관은 타이핑을 안했지만 뭔가 입력된듯 하다.
죽은 사람에게조차 자동화는 피해가지 않는다.
2. 질문 – 당신은 뭘 위해 살았습니까
“그럼 첫 번째 질문입니다.
삶에서 본인이 남긴 가장 중요한 영향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을 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내 인생은 자막 없이 소비된 영상 같았다.
그래서 그냥 솔직히 말했다.
“제가 만든 인스타 릴스가 조회수 13만 넘었어요.
강아지가 딸기 훔쳐 먹는 장면인데, 진짜 귀여워요.”
“직접 출연하셨나요?”
“아뇨, 제 목소리만 나옵니다. 뒤에서 ‘얌마~’ 하고 말해요.”
면접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당신 인생에서 가장 널리 퍼진 콘텐츠였습니다.
로그 상으로는, 그 영상이 가장 많은 사람에게 감정을 전달했네요.”
나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몸을 뒤로 젖혔다.
내 삶은 개랑 딸기가 주인공이었고, 나는 배경이었다.
3. 결정 – 다음 생의 당신은 약간 불편한 생명체입니다
“환생 등급 B-입니다.
그다지 악하지도 않았지만, 그다지 뚜렷하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다음 생은 아래의 선택지 중 하나입니다.”
면접관이 화면을 띄웠다.
- 카페 테라스의 관상용 금붕어
- 장점: 햇빛 좋고, 조용함. 평온함.
- 단점: 아이들이 종이컵으로 물 뜨다 가끔 너도 같이 뜸
- 산책 중인 강아지 발바닥에 붙는 나뭇잎
- 장점: 존재감 없이 여러 동네를 여행함
- 단점: 아무도 널 보지 않음. 네가 떨어졌다는 것도 모름. 하찮음.
- 헬스 도시락 안에 들어간 삶은 브로콜리 한 조각
- 장점: 타인에게 ‘오늘 나 건강했음’이라는 착각을 제공
- 단점: 씹히는 순간 끝남. 이름도 없이 사라짐
“사람으로는… 안 되나요?”
“사람은 희귀 자원입니다.
요즘은 전생을 콘텐츠 소비로만 쓴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당신도… 하루 평균 스마트폰 사용시간 7시간 12분.
그 중 말 없는 소비 89%.”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할 말은 있었지만, 어차피 로그에 다 찍혔을 거니까.
“…금붕어요.
그래도, 수면 위로는 뜨잖아요.”
“좋은 선택입니다.
예쁜 조명 아래서, 조용한 죽음을 맞이하실 수 있을 겁니다.”
4. 퇴장 – 삶이란 무대가 있었다면, 나는 소품이었다
포털이 열렸다.
물결처럼 빛이 일렁였고, 나는 조용히 들어섰다.
그 안은 차가운 물이었다.
익숙한 듯 낯선, 잠기는 기분.
금붕어로 태어나는 것도 이상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낯설지는 않았다.
왜냐면, 살아있을 때도 누군가를 위한 배경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조용한 세상이었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고,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딱 지금 이 순간처럼.
존재는 선택이 아니었지만, 다음 생은 약간 수치스럽게 선택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