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단편소설 – #3 진심은 편성되지 않았다.

“당신의 인생은 아름다웠습니다.”
“…그건, 제게 묻지 않았잖아요.”


1. 입장 – 무대 밖의 그녀

“식별자 044312.
입장하십시오.”

문이 열렸다.
그녀는 들어왔다.
하이힐 없이 맨발.
무대용 드레스처럼 보이는 하얀 천이,
무표정한 조명 아래서 유난히 어색했다.

웃고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익숙한 얼굴,
카메라 없는 공간에서조차 훈련된 완벽한 표정.

면접관은 고개를 들었다.
“앉으세요.”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침묵.
하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조용히 존재해온 사람이었다.


2. 식별자에게 이름이 주어지다

“대화 목적상, 호출명을 설정해야 합니다.
사용하고 싶은 이름이 있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루미요.”

“기록되었습니다. 루미.
이하 문답은 해당 명칭으로 진행됩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약간 편안해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스스로 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 로그 – 미소 뒤에 숨은 공백

“루미.
당신은 생전에
32편의 영상 작품에 출연했고,
공개 석상 41회,
매거진 표지 모델 214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웃음 기록: 3,104회
울음 기록: 72회
그 중 실제 감정으로 분류된 감정 로그는 9회입니다.”

“…전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면접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정의는 타인의 기준에서 결정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당신의 감정 로그는 대부분 *‘대응’*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알아요.
항상 누가 원하는 사람이어야 했으니까요.”


4. 삶의 요약 – 무대가 꺼지고 난 뒤

삶을 요약한다.

너무 이른 시기에 둥지가 바뀌었고,
이후엔 항상 누군가의 설계된 무대에 올라야 했다.

본명을 한 번, 얼굴은 수차례 바꿨고,
목소리는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웃음은 과잉 기록됐고,
슬픔은 종종 조명 아래 묻혔다.

감정은 늘 편집되었고,
진심은 ‘부적절한 편성’으로 분류됐다.

오랜 시간동안 박수는 있었지만,
청취자는 없었다.

마지막 하루, 무대는 없었고
조명도, 관객도, 기록도 남지 않았다.


5. 환생 – 이번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다

“당신의 환생은 다음 중 선택 가능합니다.
단, 이번 생에서는
당신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면접관은 옵션을 펼쳤다.


1. 무대 조명 아래의 마네킹

  • 모든 이들이 본다.
  • 그러나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다.
  • 누군가 옷을 입히고, 자세를 바꾼다.

2. 동물원 안의 흰 공작새

  • 보기엔 아름답지만,
  • 짝이 없다. 울음은 외면받는다.

3. 깊은 바닷속 조개 – 진주를 품고 있음

  • 닫힌 채 살아간다.
  • 열리면 상처받고 죽는다.
  • 발견되지 않으면 영원히 조용하다.

4. 봄마다 꽃 피우는 나무

  • 몇 주간 모든 관심의 중심.
  • 그 외 시간은 무명.
  • 피지 않아도, 지지 않아도 살아있다.

5. 길 잃은 철새 한 마리

  • 본능적으로 날지만 목적은 없다.
  •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알려주지 않는다.

6. 선택 – 그리고 마침내 ‘아니오’라는 대답

“선택하시겠습니까?”

루미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흰 공작새요.”

면접관은 고개를 들었다.

“이유를 말씀하시겠습니까?”

“…이번 생엔 그냥
아무도 제 울음소리를 듣지 않아도 괜찮아요.
예쁘다 해도,
그게 전부인 거…
이젠 알고 있거든요.
그래도… 날개는, 제가 폈으니까요.”


7. 퇴장 – 조명이 꺼진 뒤, 마지막 미소

포털이 열렸다.

루미는 잠시 멈췄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누구도 보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면접관은 로그를 저장했다.

[환생 대상: 식별자 044312 / 호출명: 루미]
선택: 흰 공작새
감정 잔류: 조용한 웃음

메모:
“모두가 그녀를 보았지만,
아무도 그녀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추가 기록:
“루미는 이제,
누구의 시선도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남는다.”